점심을 먹고 까따마르까로 내려가는 길은 구비구비 계곡을끼고 정말 멋진 풍경의 길이었습니다. 역시 큰 형님은 여름에 이 길을 와야 하는데... 라시며 푸념을 하셨는데, 겨울에 이 정도 경치라면 여름은 정말 멋질 거라는 생각에 동감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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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급 커브가 정말 무지무지 많더군요. 큰 형의 말로는 평생 돌릴 핸들을 여기서 다 돌린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로 커브가 많았습니다. 한쪽으로는 낭떨어지인데도 그리 위험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도로가 좋았고, 또 주변의 경치를 보느라 아슬아슬한 부분을 느낄 틈이 없었습니다.



경사도 경사고, 커브도 커브였습니다. 이어지는 도로의 풍경을 좀 보시기 바랍니다. 중간에 전망대에 잠깐 서서 계곡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주로 도로의 풍경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다가 도시가 나올 때가 되었는데, 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모두 서 있습니다. 왠 일인가 알아보니 시위대가 국도를 막았다고 하네요. 근데 이 시위대라는 사람들이 하필 다리 앞에서 길을 막았습니다. 여기서 돌아가야 하나요? 알아보다가 도시로 들어가서 비포장 도로로 돌아다니다 다리를 지나서 계속 전진을 합니다.



그렇게 들어간 한 도시의 광장에는 1980년대부터 2000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보았던 모든 중고차는 다 모여있는 듯 합니다. 레나울트 11, 12, 18, Torino와 푸조 504, 405, 404 게다가 포드 Falcon도 있네요. 정말 대단한 중고 자동차 골동품점입니다. ^^



그런데 이렇게 도로를 점거한 시위대는 한 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자그마치 세 군데서나 도로를 막았더군요. 게다가 하필 도로를 막은 곳은 하나같이 다리 앞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튼 까따마르까로 가기 위해서 비포장 도로는 물론 진흙탕까지 다리를 건너기 위해 이상한 곳들로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이런 길로 다녔습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그래도 막판에는 좋은 도로에서 경치 좋은 곳으로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한 산을 지나가면서 큰 형님은 이곳이 얼마전 아르헨티나 정부를 대항해 게릴라전을 펼치던 반군들의 소굴이었다고 설명해 줍니다. 확실히 박식한 분이시지요?



까따마르까가 가까워 질 무렵에 멀리 산자루를 보면서 산마루에 있는 국도 이야기를 해 줍니다.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있는 국도인데, 포장이 안 되어있는 정도가 아니라 잔디밭이 도로라고 하네요. 그리로 올라가는 길을 보니 정말 까마득합니다. 다음 사진을 보시면 그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저 길로 한번 가보고 싶다는 호승심 혹은 호기심이 일었지만,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니기에 그냥 지나치기로 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잔디밭 국도는 어떤지 한번 가 볼 계획을 세워 볼랍니다. ^^




그렇게 그렇게 까따마르까 시내로 들어갑니다. 사실 볼게 별로 없는 도시입니다. 도시도 자그마하고 그냥 그저 그렇습니다. 까따마르까에 좀 특산품은 뭐가 있을까요? 큰 형님은 이곳이 올리브의 집산지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또한 이곳에서 독사의 독을 해독하는 약품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둘 다 경치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니 특별히 보여 드릴게 없네요.



까따마르까를 지나쳐 라리오하로 갑니다. 가는 길에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여행이 종반으로 향해 가는군요. ㅎㅎㅎ



라 리오하는 얼마전에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지냈던 사울 메넴의 고향입니다. 물론 라 리오하 시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구요. 메넴은 라 리오하의 주지사를 지내다가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친한파로 알려진 메넴은 현재 부정부패혐의로 이런 저런 안 좋은 일로 연루가 되어 있습니다. 대통령을 낸 곳이라서 그럴까요? 20여년 전에 이곳을 왔을 때는 정말 촌 동네였었는데, 지금은 좀 활기를 띈게 그런대로 괜찮아 보입니다. 일단 저녁을 지내고 낼 아침에 한번 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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낄메스 인디오 유적지를 떠나 까따마르까로 방향을 잡고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중간에 따피 델 바제라는 곳을 지나 점심을 먹기로 하고 말입니다. 낄메스 유적지를 지나 조금 달려가자 깔차끼 계곡쪽으로 다시 풍경이 변합니다. 또 아마이차 델 바제라는 마을을 지나면서부터는 깔차끼 계곡속의 산을 넘어가기 위해 오르막길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간정도에 전망대가 있어서 잠깐 내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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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차끼 계곡 속에 있는 마을의 전경입니다. 저 뒤편으로 깔차끼 계곡의 높은 산봉우리들이 보이는군요. 가슴속이 탁 트여지는 듯한 전경에 모두들 넋을 잃고 한동안 관람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인적이 드문 곳이기는 하지만, 여기 저기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큰 형님이 이야기를 하십니다. 저희들 눈에는 별로 뜨이지 않지만,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인 양, 염소, 야마, 말, 소떼가 있다는 것은 그 말씀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가끔씩 마주치게 되는 집들에는 어김없이 태양열 전지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위성 TV 안테나까지 달려 있습니다. 이들 인디오와 비슷한 삶을 가꾸어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런 고가의 장비가 있을까요? 해답은 정부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선거때 자신들의 증명을 가지고 이런 혜택을 받는 모양입니다. 기브앤테이크로 말입니다.



산골짜기의 응달이 있는 곳은 역시 추운가 봅니다. 밤새 얼어있던 계곡의 개울물이 조르르 흐르는 소리가 있었는데, 응달쪽에는 어김없이 얼음이 얼어 있었습니다. 파라과이에서 온 친구들이나 이과수에서 온 저는 사실 길가에 이런 얼음이 얼어 있는 모습이 아주 생소합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에 사시는 친구들과 형님 세분은 그냥 차에 앉아 계시는데, 저희들은 계곡으로 달려가서 얼음도 만져보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아마 차 안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 갔겠지요?



"아무튼 촌놈들은 달라~" ㅎㅎㅎ



따피 델 바제로 넘어가는 길에서 만난 도로 보수반원들입니다. 이곳까지 중장비를 가져오는 것이 힘들어서겠지요? 롤러차 같은 것은 없고, 그냥 구멍 난 곳에 아스팔트를 채워 넣는 것으로 수리가 끝 인 모양입니다. 아무튼 그렇게라도 해서 보수를 해 주니 저희들 입장에서는 아주 고맙지요. ^^



따피 델 바제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한 고지입니다. 해발 3042 미터군요. 까파자떼가 해발 1700미터, 낄메스 인디오 유적지가 해발 2000미터였는데, 여기까지 1000미터를 더 올라온 모양입니다. 이제는 내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나머지 일정에는 해발 3000미터 이상 올라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고원 지대는 이제 끝이군요. ㅎㅎㅎ



따피 델 바제는 뚜꾸만의 부자들이 소유한 별장들이 즐비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산지의 풍경이 아주 멋있었습니다. 겨울이라 좀 침침하기는 하지만, 여름에 이곳에 오면 경치가 죽인다고 합니다. 멀리 호수와 그 주변에 어우러진 촌락의 모습은 가슴을 시원하게 해 줍니다. 내려가면서 찍은 사진을 좀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따피 델 바제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12시가 넘었네요. 식사를 하기로 했던 곳까지 가려면 좀 더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무엇인가를 먹고 가야겠다는 큰 형님의 말씀이 있어서 길을 내려가면서 첫번째로 보이는 주유소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이 지역은 이제 많이 개발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행자들을 위한 까바냐 역시 상당히 많이 만들어져 있더군요. 나중에 몇 년 후에 이 지역으로 놀러 온다면, 새로운 까바냐에서 멋진 저녁을 보낼 수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현재도 많은 까바냐들이 들어서 있기는 합니다.



처음 눈에 띄는 주유소입니다. 이곳에서 잠시 정차를 하고 간식을 먹는다는 것이 그냥 점심을 먹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에 보여드리죠. 이곳 주유소의 화장실은 잘 보시고 들어가야 합니다. 남녀 표지판이 바깥과 안쪽이 다릅니다. 바깥의 표지판만 보고 들어갔다가는 남자는 여자 화장실로, 여자는 남자 화장실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도 몇 명이 그렇게 실수할 뻔 했습니다.





주유소 뒤에서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계곡을 따라 차갑지만 아주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냇물 가로 소떼와 염소, 양떼가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 쪽으로 야마들이 우리에 갇혀 있었습니다. 야마처럼 목이 긴 낙타과 동물들은 성질나면 산이 든 침을 뱉는 성질이 있습니다. 따라서 너무 가깝게 가서 신경쓰이게 하면 안 됩니다.




주유소에 딸린 가게의 모습입니다. 출출하셨던지, 큰 형님은 이곳에서 아르헨티나 고유 음식 중 하나인 로끄로를 주문하셨습니다. 그 사이 여행의 동료들은 여기 저기 가게 안팎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저도 역시 사진기를 들고 있었기에, 이것 저것을 찍어 봅니다.



이건 복숭아 말린 것입니다. 안데스 너머 칠레쪽의 아이마라 인디오들은 이것과 율무를 넣어 끓여서 식한 음료를 마십니다. 여기서는 말린 복숭아를 어떻게 먹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차를 만들어 먹거나 물에 불려서 먹는다고 설명하는데, 맛있는 복숭아를 왜 이렇게 말리는 걸까요? 대답은 보관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아니 안데스의 거의 모든 인디오 문명은 곡식이나 과일, 야채를 말려서 보관합니다. 오랫동안 식품을 먹기 위해 고안한 그들만의 방법인 것입니다.



지역이 지역이다보니 양털로 만든, 그리고 야마털로 만든 각종 실과 공예품이 있습니다. 아무튼 잠깐 둘러보았더니 더 볼게 없네요. 저도 식탁에 앉아 앞에 놓인 치즈 조각을 입에 넣어 봅니다.



뒤쪽의 살라메는 야마 고기 살라메입니다. 앞쪽의 흰 치즈 역시 야마 젖으로 만든 치즈입니다. 뒤쪽의 누런 치즈는 소젖 치즈입니다. 흰 치즈는 맛이 좀 새콤했습니다. 그걸보면, 야마는 침 속에만 산이 있는게 아닌 모양입니다. 젖 속에도 산이 들어간 모양입니다.



확실히 야마를 많이 먹는 모양입니다. 식당 한 편으로 야마 국 혹은 탕을 주문하라는 광고판이 있었습니다. 또 위의 꼬르데로는 양고기 탕입니다. 우리는 이것들 중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 대신 로끄로를 기다렸습니다. 로끄로가 뭔지 무지 궁금하지요? 



빵과 함께 먹으라고 나온 파테인데요. 왼쪽은 고추과의 식물로 만든 가루입니다. 입에 넣어보니 매큼한 맛이 느껴집니다. 아주 아주 매운 편은 아니고, 그냥 매큼합니다. 오른쪽은 기름에 절인 채소인데, 구수한 맛이 나오더군요. 그렇게 화기 애애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주문했던 로끄로가 나옵니다.



로끄로는 옥수수로 만든 죽입니다. 하지만 옥수수 뿐 아니라 고기 - 여기서는 야마 혹은 양고기 - 와 함께 젖도 좀 들어가는데, 구수하고 영양가가 풍부한 서민 음식입니다. 조그만 그릇에 담겨 나올 줄 알았는데, 확실히 시골 인심은 대단하네요. 한그릇씩을 먹었더니 점심 식사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까따마르까 시를 향해 출발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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낄메스 Quilmes 이야기라고 하니까 아마도 아르헨티나 맥주 낄메스 Cerveza Quilmes 를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낄메스는 맥주가 아니라 인디오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낄메스 인디오들, 들어는 보셨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현재 부에노스 아이레스 남쪽에 있는 낄메스 지역의 인디오들인가?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지역에 인디오들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지금 이야기를 하는 낄메스 인디오들은 아르헨티나 북서쪽 살타 주와 뚜꾸만 주 경계 부근에 살았던 낄메스 인디오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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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어떻게 낄메스 인디오들의 폐허와 마주치게 되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여행이 종반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다섯째 날 아침이 밝자마자 까파자떼에서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남쪽으로 뚜꾸만으로 갔습니다. 아직 아침의 햇살이 비취고 있던 시간, 바깥 온도는 영하 2도를 가리키고 있었지요. 까파자떼로부터 뚜꾸만의 경계 부근까지는 모두 포도밭이었습니다.



황무지처럼 보이는 곳들을 개간해서 포도 농장을 세운 모습은 경제에 눈을 뜬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전의 황무지가 이제는 포도 농장으로, 그리고 미래에는 포도주 생산지로 탈바꿈을 하게 될 것입니다.



뚜꾸만 주에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곳에 낄메스 인디오들의 유적지에 대한 간판이 서 있었습니다. 돈을 받고 입장을 시키는 관광/유적지의 간판치고는 엉성하기만 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냥 인디오들의 것이겠거니 하면서 지나치기에는 또 뭐한것이... 아래 있는 ciudadsagradaquilmes@hotmail.com 이라는 이 메일 주소였습니다. 현대 사회를 철저하게 배척한 것도 아니면서 간판은 19세기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으니 말입니다.



유적지로 통하는 길은 비포장이었지만 좋았습니다. 아침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전 근대적인 유적지와는 아주 잘 매치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런 비포장 도로고 1킬로미터 정도를 갔을 때, 추위에 손을 비비며 한 인디오의 후손이 나타났습니다. 보아하니 이곳이 유적지의 입구인 모양입니다. 1인당 10 페소의 입장료를 받았습니다.



제 손에 쥔 것이 입장권입니다. 인쇄된 입장권은 또 최첨단 인쇄술을 사용했네요. ㅎㅎㅎ



입구 부근에 서 있는 기념비입니다. 2008년에 만들어진 모양이네요. 당연히 1990년대 초반에 이곳에 왔던 저는 낄메스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한게 당연해 보입니다.



낄메스 인디오들의 유적지입니다. 잘 보시면 산 중턱까지 집터가 있습니다. 젤 끝에는 추장이, 그리고 그 아래쪽으로 신분이 높은 인디오들이 살았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평민들이 살았던 모양입니다. 한때 이 지역에는 20000명에 달하는 인디오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과장된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닌 모양입니다. 실제로 인디오들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로는 적게 잡아서 2만 명이라고 하니까요. 나중에 전쟁에 지고 나서 포로로 끌려간 인디오들만 수천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그 숫자를 반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적지 입구쪽에 있는 선인장들의 모습입니다. 선인장들의 크기는 보통 성인의 서너배가 충분히 됩니다. 선인장의 하나 하나에 인디오들의 모자와 옷을 입혀 적군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이야기가 농담이 아닌 모양입니다.


낄메스 인디오들은 잉카에 의해서 한 번 정복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잉카는 이들 낄메스 인디오들에게 그들의 선진 문화 즉 축조술이나 관계 수로에 대한 기술과 지식을 전수하면서 개런티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발전된 지식과 기술을 전수받은 낄메스 인디오들은 이후 언젠가 이곳으로 침범해 들어올 스페인 사람들을 대항해서 싸우며 견딜수 있는 방법을 습지하게 된 듯 합니다.



유적지에는 수원이 없었습니다. 가까운 곳으로 산타 마리아 강이 있어서 유일한 수원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20000여 명이 이곳에서 거주를 하려면 강뿐 아니라 유적지 안쪽으로도 무엇인가 급수가 가능하게 하는 수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쉽게도 그런 흔적이나 그에 대한 정보는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유적지의 집터에서 하나 하나 볼 수 있었던 것은 벽 자체가 요새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벽의 두께는 어림잡아 7, 80센티미터가 되었습니다. 어떤 벽의 두께는 1미터가 넘었습니다. 이 정도 벽이라면 스페인 군의 총알이나 포탄으로도 겹겹이 두른 벽을 깨뜨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넓은 바위 위에는 인디오들이 절구로 썼을 것으로 보이는 구멍들이 많았습니다. 이 곳은 이른바 마을의 여러 여자들이 한꺼번에 일을 했던 장소로 보이네요. 절구처럼 보이는 구멍들이 한 두개가 아니라 십 수개가 한 바위위에 있었거든요.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더 시야가 넓어집니다. 이미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 큰 형과 큰 형님은 아래에서 올라오지 않고, 처음 온 사람들만 위로 올라갔습니다. 꼭대기에서 보면 정말 시야가 트여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겨우 중간 아래쪽에서 보았을 때에도 멀리 산타마리아 강까지 한 눈에 들어왔거든요. 아마 저쯤으로 행군해 오는 스페인의 군사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전략을 연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낄메스 인디오와 연합한 2 군데의 인디오 세력은 줄잡아 130년 동안 이곳에서 스페인 군대에게 저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배를 당하게 되었을 때, 살아남은 여자들은 뒤쪽의 산을 넘어 도망을 했고, 남자들은 수 천명이 1200킬로미터 떨어진 오늘날의 낄메스 지역까지 도보로 끌려갔습니다. 수 개월에 걸친 이 행군중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은 낄메스 인디오들은 자신들끼리 결의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여자들은 임신을 하지 않기로, 여자들이 임신을 하면 자결을 하기로, 남자들은 장가를 들지 않기로, 장가를 가더라도 씨를 남기지 않기로 결의를 했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그 결의를 지켰다고 합니다.


낄메스 인디오와 안데스 지역의 인디오들을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끌고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남 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도시의 도로를 건설하는 데 사용되는 석재 기술이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현재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를 덮고 있는 아스팔트를 살짝 걷어내보면 돌이 깔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같은 석재를 다루는 데, 안데스의 인디오들은 특별했던 모양입니다. 그 기술자들이 필요했기에 수천명의 인디오들을 포로로 끌고 간 것입니다.



오늘날 낄메스 유적지와 그 인근에는 2010년 기준으로 200여 명의 낄메스 인디오의 후손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 인디오들은 현대 사회의 문명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조상들의 유적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문자로 역사가 기록되지 않은 민족이다보니 복원에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낄메스 인디오들이 가지고 있었던 독특한 주거 방식같은 것들은 몇몇의 고증을 통해 어느정도 복원을 한 모양입니다. 저희가 방문한 이 유적지는 그런 복원 노력의 한 결과일 것입니다.



낄메스 인디오들의 유적지에는 이렇게 한산한 기념품 가게가 있습니다. 큰 형님은 이곳에 만들어진 돌로 된 호텔에서 숙박을 해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가능하면 이곳에서 자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 호텔은 몇 년전에 있었던 어떤 분쟁 때문에 폐쇄가 되어 있습니다. 이 호텔의 폐쇄로 인해 낄메스 인디오들의 유적지는 더더욱 찾는 사람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호텔이 다시 개장을 하게 된다면, 이곳에서 한번 꼭 숙박을 해 볼 것을 큰 형님으로부터 권고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기회가 된다면 이 호텔에서 꼭 숙박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출발하기 전에 본 간판입니다. 1534년부터 1665년까지 자그마치 131년동안 스페인 정복군에 맞서 저항했다는 간단한 기록의 간판입니다. 개화라는 명목으로 수백년간 자연과 함께 살아온 문명을 파괴했던 16, 17세기의 유럽 강국들이 21, 22세기에는 더더욱 도마에 오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존 공생하는 길을 택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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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an 의 라틴 아메리카 이야기
이 블로그는 이과수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에 더해서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가지 이야기를 담게 되었습니다. 남미는 더이상 신비의 땅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보가 부족합니다. 이 방에서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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