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의문 몇가지. 첫째는 전 세계에서 브라질 커피가 차지하는 비중은 공급면에서 단연 1위. 생산량 기준 거의 반절에 달한다고 하는데, 질 좋은 커피 랭킹은 10위권 내에 단 하나의 브랜드도 내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두번째, 슈퍼마켙을 가 보면 가끔 원두커피를 살펴보는데, 같은 메이커의 원두 커피가 그냥 원두일 경우가 갈아놓은 원두에 비해 훨씬 비싼 이유는 뭘까? 갈아 놓았다는 것은 한 공정을 더 한 셈인데, 공정이 더 들어간 커피가 그냥 원두커피보다 싼 - 거의 반 값에 판매되는 이유는 뭘까?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저와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 포스팅은 그 의문을 말끔히 해소시켜 줄 것입니다. 기대하시라~~~~!!!!



먼저, 아내와 저는 이번에 포르탈레자로 여행을 하면서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수 없이 많은 현지, 외국인 친구들을 모두 찾아보았습니다. 비빌데가 없는지도 함께 찾아보았지요. 그 결과 소규모 커피 농장을 경영하는 와이프의 오랜 친구와 연락이 재개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양반의 커피 농장이 우리 부부가 가는 길목에 들어 있더군요. 연락 끝에 그분의 커피 농장에서 하루를 지내기로 약속을 하고 방문을 했습니다. 하루를 보내고, 주인의 소개로 궁금했던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커피 농장은 상파울로에서 벨로리존치로 가는 길 중에 뜨레스 꼬라쏭에스를 지나 상 안토니오 도 암파로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브라질에서 생산되는 커피는 주로 두 지역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하나는 상파울로와 이남의 파라나 주 경계 부근에서 나오고, 또 다른 지역은 상파울로 주 북쪽과 미나스 제라이스 주 경계 부근에서 생산된다고 합니다. (두 군데 모두 방문해 보아서 아는데, 많은 커피 가공 공장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커피가 아라비카인데도 불구하고 두 지역의 커피 품질은 차이가 많아서 대부분의 커피 마니아들은 (좀 아는 분들은) 파라나 주의 커피보다는 이곳 미나스 제라이스 주의 커피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선호도는 가격에도 차이를 주는데, 60kg짜리 원두(로스팅이나 블랜딩 전의 그냥 원두) 한 가마니에 남쪽 커피는 360헤알~380헤알인데 북쪽 커피는 400헤알이 훨씬 넘어간다고 합니다. 대략 1kg당 원두 가격을 보니 남쪽 커피도 적어도 6헤알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슈퍼마켙에서 파는 갈아놓은 원두 커피가 kg당 3불 미만이라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겠지요?


브라질 커피의 대부분은 향이 좋다는 아라비카 품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아라비카라고 해도 품질은 차이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농장 주인인 바우지르 씨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커피는 주로 5번 타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자신의 농장에서 나오는 커피는 6번 타입이라고 하더군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저에게 설명해 주더군요. 1번 타입은 존재하지 않는 커피라고 합니다. 전세계 커피중에 가장 좋다는 커피는 2번 타입 혹은 3번 타입이라고 합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커피들, 즉 랭킹의 윗 부분에 있는 커피들은 대개가 2번 타입 혹은 3번 타입이라고 하네요. 브라질에서는 4번 타입~6번 타입이 많이 생산되는데, 미나스 제라이스의 이 지역에서는 5번과 6번 타입이 주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게다가 브라질 커피가 콜롬비아 커피에 비해 뒤질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설명해 주었습니다. 커피 열매는 붉은 색일 때 따야 제일 좋은 커피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콜롬비아 커피 농장에서는 1년 내내, 저렴한 일꾼들의 수공을 통해 잘 익은 붉은 커피만을 채집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최고급 커피가 생산이 되겠지요?


하지만 브라질의 경우, 일단 인건비가 비쌉니다. 그리고 커피 수확을 6월~9월까지 단지 4달동안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4달 동안의 수확으로 전세계 커피 수요의 1/3~1/2를 담당해야 하니, 붉은 커피만 따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 사진과 같은 기계를 트랙터에 달고서 커피 밭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위 기계는 각각의 봉들이 흔들리면서 커피 열매들을 땅으로 떨어뜨립니다. 붉은 색이거나 검은색이거나 흰색이거나 녹색이거나... 아무튼 익었든지 안 익었든지 모두를 땅으로 떨어뜨립니다.


그 다음 공정은 땅에 떨어진 커피 열매를 흡입해서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커피 열매는 물론이고 주변의 흙까지 모두 빨려들어갑니다. 이렇게 모여진 흙+커피를 분류하기 위해 다음 기계로 보내집니다.



물과 함께 이 기계로 보내지면, 진흙과 흙은 아래로 떨어지고 커피 원두만 위쪽으로 뜨게 됩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구분이 되어 분류가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작 익은 커피와 익지 않은 커피의 구분이 안 됩니다. 요즘은 전자식으로 센서를 이용해서 익은 정도를 구분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아무튼 제가 방문한 농장에서는 그런 분류가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물 속에 있었으니, 분류 된 다음에는 이제 말려야 합니다. 원두를 추출하기 전에 말리는 과정이 있는데, 많은 농장들(재래식)에서는 넓은 마당에 커피를 쏟아놓고 햇빛에 말리고 있었습니다. 좀 더 넓은 마당을 가진 사람들은 손수 커피를 뒤섞어 주는 대신에 오토바이나 트랙터를 사용한다고 말해 줍니다.



커피 열매들이 새까맣게 되어서 좀 이상하죠? 저도 이 커피가 상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품종이 그래서 그렇고, 실제로 원두는 좋다고 했습니다. 6번 타입의 커피로는 꽤나 괜찮은 커피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몇날 며칠을 들여서 커피가 마르게 되면, 이제 과육을 제거하고 커피 원두만을 모으는 기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 끝에 원두 커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우지르 씨는 원두 커피 봉투를 열고 저에게 한 줌을 들어 향을 맡아 보라고 합니다. 생전 처음으로 로스팅이 되지 않은 커피를 향을 맡아 보았습니다. 커피 향이 날줄 알았는데, 약간 매큼한 피망의 향이 느껴집니다. 향이 좀 그렇다고 말했더니, 상한 커피는 아주 썩은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 이 커피의 피망 향은 좋은 커피라서 그렇다고 설명해 주십니다.



자 이렇게 해서 커피 농장의 견학을 끝냅니다. 아직 못 다한 이야기가 있지요? 첫째, 왜 브라질에는 좋은 커피가 별로 없냐는 이야기... 앞서 설명했듯이 브라질의 인건비, 수확하는 기간, 대량 생산으로 인한 병폐 등등, 이와 같은 문제들 때문에 양질의 커피가 생산되기 어렵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소규모 화 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커피 브랜드를 키워나가는 브라질 회사들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더 많은 좋으 커피들을 맛보게 될 거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두 번째, 왜 슈퍼마켙의 공정이 더 들어간 커피가 왜 더 싸냐는 의문이었지요? 잠시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알 듯 합니다. 바로, 원두 커피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바우지르 씨는 한 때 커피의 볼륨을 높이고 무게를 더해주기 위해 생산자들이 두 가지 물질을 첨가하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톱밥, 또하나는 모래. 아무튼 둘 다 커피의 맛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무게만 나가게 했다고 하네요. 지금은 그런 일이 많이 줄었지만, 슈퍼마켙에서 킬로그램당 미화 4불 미만의 커피는 안 마시는 것이 더 좋을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사 마시는 커피의 가격은 어떤가요?


커피 농장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는 좀 더 좋은 커피를 마셔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요?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아래에 댓글 좀 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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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아라, 포르탈레자 그리고 꿈부꾸

문화/기타 2013. 11. 29. 02:00 Posted by juanshpark



브라질 북동부에 위치한 포르탈레자 라는 도시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지난 1월과 2월을 이곳에서 보내고, 이제 이 지역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내요. 그래서 앞으로는 종종 이 지역에 대한 글을 좀 써 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먼저 무엇에 대해 써 볼까요? 포르탈레자 라는 도시의 의미는 "요새"를 의미합니다. 요즘의 다른 말이 아니라 나바론 요새와 같은 군사적 의미에서의 요새를 포르투갈어로 번역한 것이 포르탈레자 입니다. 중남미의 도시들은 대부분 식민지 시대에 군사적 요충지로서 시작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남미의 도시들의 예전 이름을 보면 "포르탈레자 데 XXXXX" 혹은 스페인어로 "푸에르떼 데 XXXXX" 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 포르탈레자도 역시 그런 요새들 가운데 하나 였습니다.


재밌는 것은 브라질의 다른 도시들, 즉 마나우스나 벨렝이나 상 루이스나 모두 요새 도시들로 시작되었고, 그들 도시들의 예전 이름은 하나같이 "포르탈레자 데 _____" 라고 불리다가 근대화가 되면서 "요새"라는 단어를 빼고 부르다가 다른 이름으로 정착을 했는데, 포르탈레자의 경우는 오히려 그 "요새"라는 단어를 도시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 학자들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ㅎㅎㅎ


포르탈레자는 브라질의 근대 역사에서 중요한 한 획을 그은 도시입니다. 브라질의 노예 해방은 제일 처음으로 이 도시 즉 포르탈레자에서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아무튼 처음 노예 해방을 했다는 것 만으로도 이 도시는 긍지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포르탈레자 해변가 쪽으로 중요한 도로 중의 하나가 Av. Abolição 즉 노예 제도의 폐지를 의미하는 단어로 명명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브라질 북동부의 포르탈레자에 오셔서 화려한 중심가 거리를 지나다가 혹 그 거리가 아베니다 아볼리썽 이라면 노예 제도의 폐지를 한번 쯤 떠올리셔도 좋을 듯 합니다.


도시 규모로서 포르탈레자는 브라질의 10대 도시 가운데 하나로 들어갑니다. 인구 수가 2백 50만명에 달하는 대도시이고, 메트로폴리탄이라고 불리는 위성 도시들까지 포함한 포르탈레자 시의 수도권에는 400만 인구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브라질 북동부 에서는 바이아 주의 살바도르 다음으로 인구 수가 많습니다. 비슷한 규모의 페르남부쿠 주의 헤시피보다 조금 더 인구가 많습니다. 하지만 인구 수에 비해서 대도시로서의 포르탈레자는 주변 도시들이나 지방에는 영향력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나따우나 조앙뻬소아와 같은 도시들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기준이 되는 도시라면 단연 헤시피입니다. 예컨대 손님이 무엇을 주문할 때, 물건이 없다면 그 도시들의 상점들은 헤시피에 문의를 해 보고 결정을 내립니다. 포르탈레자로 문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포르탈레자는 주변 대도시들에 미치는 영향이 없습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가깝다는 나따우가 550km, 조앙뻬소아는 약 700km 떨어져있고, 반대쪽으로 테레지냐 라는 도시는 670km 떨어져 있습니다. 당연히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할 수 밖에 없죠.


영향력이 없다보니 포르탈레자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의존하는 도시도 별로 없고, 또 뭐 그래서인지 독립심이 아주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쎄아라 주 즉 쎄아렌세 들하고 이야기를 해 보면 자신이 쎄아렌세라는 것에 대해 아주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자기들만의 의식주를 "꾸우뚜라" 즉 "문화"라고 부르는데, 좀 자세하게 물어보면 브라질의 다른 도시, 지역들하고 그다지 다르지 않건만 그것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것인양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눈에는 꾸우뚜라 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바리에다지(다양성) 정도 선인데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다양하거나 다채롭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합니다. ㅎㅎㅎ


열대지방에 대한 우리네 선입견처럼, 쎄아라 사람들은 상당히 게으릅니다. 자기들끼리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 - 특히, 유럽 사람들 - 눈에는 더더욱 게으르게 보이나 봅니다. 이곳에 와서 많은 유럽 사람들을 알게 되었는데, 이구동성으로 이곳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하니 그게 맞나 봅니다. 그러니 빨리빨리로 유명한 한국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그냥 게으른게 아니라 느려 터졌다고 할 만 합니다. 게다가 놀고 먹기 좋아하는 성품이 노예 시절부터 내려왔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일은 별로 안하면서 소송을 걸어서 떡고물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개중에 일을 잘하는 쎄아렌세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사람들은 정말 10명중에 한명 꼴이라고 합니다. 이래저래 쎄아렌세가 되려면 성질을 많이 죽여야 할 듯 합니다. 뭐, 전 좀 게으른 편이라서 적응하기가 어렵지 않을 듯 합니다. ㅋㅋㅋ


이런 곳에 현재 한국의 포스코와 동국제강에서 투자를 해서 제철소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 많은 한국인이 이 구석진 곳까지 와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민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정말 용감하신 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언어와 풍습이 다르고, 노동조건과 비자문제, 또 이런 저런 문제들 때문에 이곳에서 일하시는 것이 그냥 단순히 "해외 근무"라고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민자들과는 달리 이 지역에서 근무를 하고 계시는 분들의 이야기, 그분들이 알아야 할 이야기나 아시면 좋을 이야기에 대해서는 조금씩 조사를 해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면으로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꿈부꾸 해변은 포르탈레자 시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으로는 제일 멋진 해변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라네요. 브라질 친구들의 이야기로는 세계에서 바람이 가장 많이 부는 곳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 해변을 다 돌아보지 못한 사람이라 뭐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카이트 서핑을 하러 온 유럽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한국인들 대부분은 한국에 계실 때, 가까운 동남아의 유명 해변가를 가보신 적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이 해변가로는 그닥 멋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많이 부는, 그래서 멋진 해변가라면 조금은 특색있는 해변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왕 이런 해변가에 오셨다면, 시간을 내서 이런 스포츠를 즐겨보는 것도 외국에서 생활하는 사람에게 한 가지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현실의 한국인들은 이게 좀 힘들어 보입니다. 그런 점들도 나중에 다시 포스팅을 해 보겠습니다. 아무튼, 브라질 북쪽 포르탈레자. 저는 적도 부근에 살아볼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결국 여기서까지 살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런거 보면, 참 사람 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하겠다 ㅡ. 뭐 이런 다짐을 다시 한 번 해 봅니다.


블로그가 좋으셨다면 추천도 한번, 댓글도 한줄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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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지도를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전체 경로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경로의 상태는 어땠는지만을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차후로 경로 이동 중에 어떤 관광을 했고, 무엇이 좋았는지, 또 어떤 재밌는 것을 관찰했는지는 하나 하나 포스트를 해 나갈 생각입니다. 그럼, 이제 지도를 보시겠습니까?



저희의 여행은 포스 도 이과수Foz do Iguassu, PR 를 출발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꾸리찌바 Curitiba, PR 까지 650여 km 를 주행했는데, 당시 비가 엄청 내리고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포스 도 이과수에서 꾸리찌바까지는 9개의 톨 게이트가 있습니다. 하나 하나 엄청 비싼 비용을 물어야 하지요. 하지만 길은 아주 좋습니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운전을 해서 꾸리찌바에 도착한 후 이틀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꾸리찌바에서 상파울로 Sao Paulo, SP 에 이르는 400여 km 길은 더더욱 좋았습니다. 톨게이트가 몇 개나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매 톨게이트마다 1.4 헤알의 아주 저렴한 비용을 받았기 때문에 대 여섯개의 톨게이트를 지날때 기분이 좋았습니다. 꾸리찌바에 살 때 이 길을 많이 다닌 탓에 400여 km가 아주 편안했습니다. 저희는 상파울로에서도 이틀을 지냅니다.


상파울로에서 다음 구간인 벨로리존치 Belo Horizonte, MG 로 가는 페르낭 디아스 Rod. Fernao Dias 는 길이 아주 좋았습니다. 상파울로와 파라나 주의 도로들과는 달리 이 길은 상당히 좋았지만, 톨게이트 비용 역시 아주 착했습니다. 전체 650여 km에 대 여섯개의 톨게이트가 있었지만, 각 톨게이트 비용은 역시 1.4 헤알이었습니다. 저희는 벨로리존치에 못 미쳐 상 안토니오 데 암파로 Sao Antonio de Amparo, MG 라는 시골 마을에서 하룻 저녁을 묵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재밌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 지역을 떠날 때 자동차가 약간 기스가 났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자동차를 수리하지 않고 지내고 있습니다. ^^


상 안토니오 데 암파로를 떠나 벨로리존치까지는 길이 아주 좋았습니다. 벨로리존치를 수십 km 못 미쳐 한 산맥을 지날 때 경치는 아주 좋더군요. 그리고 벨로리존치를 지나서 이빠칭가 Ipatinga, MG 라는 도시까지 갔는데, 마지막 200여 km는 밤에 운전하는 바람에 경치를 볼 수 없었습니다. 길은 좋았지만, 꼬불꼬불해서 아주 애먹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그 부분이 경치가 아주 수려하다고 하더군요.


이빠칭가에서 하루를 묵고는 북쪽으로 달려서 고베르나도르 발라다르 Gov. Valadar, MG 를 지나 떼오필로 오또니 Teofilo Otoni, MG 라는 곳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바이아 주 Estado de Bahia 를 들어간 다음 뽀르또 세구로 Porto Seguro, BA 까지 달려갔습니다. 길이 아주 안 좋았고, 앞 유리창이 중간 중간에 있었던 비포장 도로에서 상처가 많이 났습니다. 특히 미나스 제라이스 주와 바이아 주의 경계에 가까워지면서 미나스 주의 도로는 비포장이 군데 군데 참 많았습니다. 돈을 받지 않는 길이라 그랬는지, 저녁에 다니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도로더군요. 하지만 중간 중간에 경치는 그런대로 볼 만했고, 메마른 땅이 많아서 서글프게 하는 광경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바이아 주에 들어오면서는 경치가 수려하고 초목이 무성해서 아주 좋았습니다. 경치가 수려하기로 아마존에 버금가는 곳이 바이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은 대체적으로 좋았지만, 가끔씩 큰 구덩이가 하나씩 있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합니다. 바이아 주 전체의 도로가 그렇기 때문에 시야가 좋은 낮에만 다닐 것을 권해 드립니다.


저희는 뽀르또 세구로에서 하루를 보낸 뒤에 살바도르 Salvador, BA 로 이동했고, 살바도르에서 하루를 보낸 뒤에 다시 세르지페 주의 주도인 아라까주 Aracaju, SE 로 이동을 했습니다. 도로의 상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체적으로 무난했지만, 가끔씩 구덩이가 있다는 것은 비슷하더군요. 곳곳이 4차선으로 넓히는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 완공되면 남북으로의 여행이 상당히 빈번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아라까주에 있는 동안 산 프란시스코 강 Rio Sao Francisco 의 상류에 있는 싱고 계곡 Canyon de Xingo 을 관광합니다. 그리고 이틀 뒤 아라까주에서 출발해서 알라고아스의 주도인 마쎄이오 Maceio, AL 로 갔는데, 길 상태는 여전합니다. 한가지 좋은 것은 바이아 위쪽으로는 톨게이트가 전혀 혹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포르탈레자에 이를 때까지 계속됩니다. 간혹 길이 아주 좋은 곳들도 있었지만, 톨게이트는 없었습니다. 적어도 브라질 북쪽에서는 톨 비용이 비싸서 여행을 못다니는 일은 없을 듯 합니다. 


마쎄이오에서도 이틀을 보냈습니다. 마쎄이오에서는 하루를 시간을 내서 장가다 Jangada 를 타고 도심지에서 몇 km 떨어진 바닷속의 천연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말 희한한 경험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브라질 북쪽의 마쎄이오나 기타 지역에서 천연 수영장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특이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포스트를 해 올리겠습니다.


마쎄이오를 떠나 페르남부쿠 주의 주도인 헤시피 Recife, PE 를 지나 파라이바 주의 주도인 조앙 뻬소아 Joao Pessoa, PB 로 갑니다. 알라고아스 주를 지나갈 무렵 나타난 마을인 노보 리노 Novo Lino, AL 라는 마을부터 페르남부쿠 주의 마을인 셰셰우 Xexeu, PE 를 지나 빨마레스 Palmares, PE 에 이르는 60여 km길은 이번 여행중 최악의 도로였습니다. 군데 군데 패이고 벗겨진 것은 그런대로 봐줄만 했는데, 더 경악스러웠던 것은 주변 마을의 어린이들이 모두 몰려나와서 길 가에 서서 곡괭이와 삽 등을 들고 조금씩 흙을 날라서 구덩이에 던져 넣으면서 속도가 줄어진 자동차나 트럭에 다가와서 구걸을 하는 모습이 충격이었습니다. 그에 더해서 그 구간의 길이 4차선 도로 혹은 도로 공사를 하는 중간에 있는 구간이라는 것이 더더욱 황당하게 하더군요.


페르남부쿠의 주도인 헤시피는 북쪽에서 꽤나 유명한 동네입니다. 하지만 헤시피를 지나면서 차량이 정체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점심시간을 지나치고 거의 두시간 반을 잡혀있었습니다. 결국 정체되어 있던 동안 차에서 내린 와이프가 동네 가게에 들어가서 군것질 거리를 사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요기를 했는데요. 한 마을의 딱 출구에서 아스팔트를 깔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큰 공사도 아니고, 겨우 5미터 정도의 아스팔트 수선을 위해 그 많은 차들이 잡혀 있었다는 사실이 경악스럽습니다. 이래저래 처음 인상부터 구겨졌던 페르남부쿠는 헤시피 주변의 차량 정체 현상까지 겹치면서 이번 제 여행의 최악의 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헤시피부터 조앙 뻬소아까지의 길은 4차선 도로가 아주 좋았습니다. 패인데도 없었습니다. 길이 훌륭한 대신 카메라가 좀 있었습니다. 그래도 노면 상황은 아주 좋아서 괜찮았습니다. 다음, 조앙 뻬소아에서 나탈 Natal, RN 까지의 200여 킬로미터 역시 길이 아주 좋았습니다. 여기도 역시 4차선 도로더군요. 이 부근을 여행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보입니다.


나타우에서 참외가 많이 나오는 모쏘로 Mossoro, RN 를 지나 까노아 께브라다 Canoa Quebrada, CE 라는 해변까지 이르는 길도 노면의 상태가 아주 좋았습니다. 구멍도 거의 없었고, 길도 편안했습니다. 단, 쎄아라 주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카메라가 무지 무지하게 많았습니다. 그것도 거의 모든 길의 제한 속도가 80km/h 였습니다. 간간히 카메라들은 60km/h 로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천천히만 다니면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또 까노아 께브라다 해변가는 정말 멋진 곳이더군요. 포르탈레자에 계신 한국인들은 가까운 곳이므로 간간히 여행을 다녀도 좋을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6일동안 총 5200km 를 여행했더군요. 여행을 마치고 나니 다시 한번 뛰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게는 5000여 킬로미터의 여행이 너무 좋더군요. 지루하다는 생각은 한번도 들지 않았습니다. 정말 역마살을 타고난 것이 아닌지... ㅎㅎㅎ


블로그에 대한 댓글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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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딱지를 떼어가며 꼬르도바에서 남쪽으로 서행을 했던 이유는 비쟈 벨그라노에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직진을 했더라면, 밥 먹을 곳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밥 먹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비쟈 벨그라노로 우회를 했던 것이죠. 따라서 딱지까지 떼인 이상, 멋지고 맛있는 곳에서 밥을 먹어야 정상입니다. 그리고 비쟈 벨그라노 경계로 들어오자마자 한 구석에서 멋지게 생긴 맥주 간판이 나타났습니다. 일단 차를 세우고 들어가 보기로 합니다.


전체 여행의 경로를 아시고 싶다면 <여기>를 눌러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변에도 여러 간판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격적으로 식당들이 늘어서 있는 곳으로 보입니다. 그 중 코너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보기로 합니다.



식당의 이름은 비어켈러 Bierkeller입니다. 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이름일 거라는 데에 대부분 동의했습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참, 이 지역 비쟈 벨그라노는, 언젠가 제 블로그에서 기술한 적도 있지만,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많은 독일 사람들이 그들의 생활 및 주거 방식대로 꾸미고 사는 마을입니다. 한국에도 남해에 독일 마을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곳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문은 꼭 닫힌 모습이었지만, 팻말이 열려있다고 합니다. 문이 닫혀있더라도 겁내지 마시고 문을 밀고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안에는 아직 손님이 별로 없었습니다. 저희는 아직 관광철이 아니기 때문이려니 라고 생각했는데, 들어가자마자 사진 찍기를 정말 잘했습니다. 우리 일행이 식사를 마칠 즈음에는 빈 자리 하나 없이 꽉꽉 들어차 있었거든요.



안의 집기와 장식과 가구는 모두 독일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현대 독일의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척 보기에도 독일 식으로 꾸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투박한 가구는 무겁기까지 했지만, 한편 정겹기도 했습니다. 이제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주문해 봅니다. 우리 일행은 독일식 소시지 요리를 두 종류 주문하고 이것 저것을 더 주문했습니다.







우리 일행이 앉은 자리입니다. 넓찍한 장소를 찾다보니 이렇게 되었는데, 화장실 옆이기는 했지만 쾌적하고 따뜻하고 좋았습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가져다 준 안주와 간식 거리들입니다. 이곳이 독일촌이다보니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중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사제 맥주들이 있었습니다. 화이트와 블랙 말고도 중간 정도의 맥주들이 있어서, 한 병씩 마셔 보기로 합니다. 운전하는 큰 형을 빼고 모두 한 잔씩 시음을 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세 종류인데, 나중에 파라과이에서 온 친구들은 운전하느라 못 마셔본 큰 형을 위해 따로 1인당 3병씩을 사서 선물을 하더군요. 집주인이 아주 좋아했나 봅니다. 많이 산다고 맥주병까지 한 병씩 선물을 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








이렇게 생긴 요리들을 먹고 마시고 하니 좋더군요. 독일식 음식은 한국인들의 입맛에는 덤덤하고 담백하고 어쩌면 느끼하기까지 하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들식으로 발효를 시킨 슈크루트까지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밋밋하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이 집의 영업 시간입니다.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연답니다. 즉 월, 화 요일은 안 연다는 뜻이죠? ㅎㅎ;; 하지만 연휴가 길 경우는 월 화요일도 여는 모양입니다. 시간은 정오부터 15시까지, 그리고 20시 15분부터 밤 늦게까지 열고 있습니다. 예약은 받긴 하지만, 점심 시간에 첫 파트에만 받는다고 합니다. 이곳까지 오셔서 낭패를 보시기 싫다면, 꼭 이 블로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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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귀가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방향을 잡고 열심히 출발을 했습니다. 산이 많은 지역이지만, 꼬르도바 주를 지나면 편편한 모습이 계속 되기 때문에 눈요기를 할 수 있는 마지막 아침이라고 하겠네요. 아침 일찍 출발해서인지 꼬르도바 주의 첫번째 관문인 크루즈 데 에헤 Cruz del Eje 에 도착할 무렵 해가 뜨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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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르도바에 들어오면 이제부터는 길도 꼬불꼬불하고 카메라도 많이 설치되어 있는데다 곳곳에 경찰이 숨어 있기 때문에 트래픽이 많더라도 조심해서 다녀야 합니다. 다행히 꼬르도바의 경치도 아기자기 한데다 한국과 비슷한 풍경이 많기 때문에 질리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조심해야 한다는....


자, 다음 사진부터 주~욱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변의 풍경도 풍경이지만, 한 가지 주의깊게 살펴봐야 하는게 있습니다. 다음 문장이 나올 때가지 보여지는 모든 사진에는 공통적으로 한 가지가 나타납니다. 그게 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세요. 첫 사진부터 마지막 사진까지는 거의 1시간 정도의 시간차가 납니다. 그 사진의 공통점을 찾아 보세요.























아 참, 중간에 풍경 사진만 나온 곳에서 공통점이 없군요. 미안.... 아무튼 풍경 아닌 풍경이 찍히고 도로가 찍힌 모든 곳에는 칠레에서 온 한 붉은색 차량이 나옵니다. 이게 뭔 뜻이냐면, 길이 꼬불꼬불한데다 추월 금지가 되어 있는 곳들이 많다보니 한 시간 가량을 저 붉은 색 차량만 쫓아갔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결국 참다 참다 못해서 25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베테랑 운전사인 형님이 추월을 했다가, 바로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찰에 잡혀서 무지 큰 벌금딱지를 떼고 말았다는....


그래서 그 다음 풍경에는 저 지긋지긋한 붉은 색 칠레 차가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이해 하시겠습니까? 아무튼 꼬르도바 주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느긋한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면서 느긋하게 운행하시기 바랍니다. 괜히 좋은 기분으로 관광 나왔다가 벌금을 물어 기분 나빠지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붉은 색 칠레 차가 없어진 꼬르도바의 모습입니다. 여전히 평화로워 보입니다. 저희들 일행은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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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람빠쟈 국립공원을 돌아다니며 보면, 저 높은 벽 위에 군데 군데 흰 부분이 보입니다. 도대체 뭘까요? 가이드는 그것이 콘돌의 배설물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벽 아래쪽으로도 군데 군데 흰 부분이 있는데, 그게 콘돌의 똥~! 이 아니라, 그건 소금이었습니다. ㅎㅎㅎ;; 이 부근에는 땅 자체가 염분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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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우리 일행은 처음 내려서 한 바퀴를 둘러보고 난 후에는 이렇게 트럭의 위쪽에 놓여진 자리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예전과는 달라져서 모두들 카메라의 뒷 부분의 디스플레이를 보면서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신기한 것들도 한두개씩 건지고 있습니다.



태고적에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절구라고 합니다. 앞서 낄메스 인디오들의 절구도 비슷해 보였는데, 여기도 그런 문화가 존재했었나 봅니다. 그나저나, 이 계곡에 살았던 그 인디오들은 뭘 먹고 살았으며, 지금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시간 속에 묻혀진 이야기가 너무 많아 보입니다.



이곳에 살던 인디오들의 그림이라고 합니다. 무슨 도료를 사용했기에 지금까지, 가이드의 말대로라면 수만년동안 저 그림이 지워지지 않았던 것일까요? 정말 신기한 도료였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가이드는 이런 저런 해설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었지만, 제가 보기에는 예술성이나 창작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어쩌면 인디오 아이들이 그냥 "장난삼아" 그렸던 것은 아닐까요? 수준이 딱 그렇게 보였습니다. 근데 그게 단지 저만의 생각이었을까요?



이 그림의 주제는 "ㅇㅇ하고 싶다" 라고 합니다. 도대체 뭘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알아맞춰 보시기 바랍니다. !!



그런가 하면 그냥 동물들의 그림만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떼 지어 돌아다니는 저 그림은 과나꼬 떼가 아니었을까요? 우리도 딸람빠쟈를 돌아다니면서 과나꼬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그냥 무늬가 그려져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그린 사람들은 어떤 목적으로 이것을 그렸을까요? 그들이 죽음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 알아 보는 것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기록도 없는 상황에서 학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해설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살아오던 인간들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동물들은 자취를 감추지 않았고, 계속 번식을 하며 살아온 모양입니다. 독수리의 일종으로 시체를 먹고 사는 이 새 역시 관광객의 사진 세례를 받으며 유유히 모래위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또 이 부부를 보십시오. 토끼 같기도 하고 리에블레 같기도 한 이 동물들 역시 관광객들이 지나가자 자신들의 처소로 돌아가더군요. 그런 그들의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웠습니다. 이들 역시 인간이 사라진 이곳에서도 생태계의 한 부분을 이루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조그만 들짐승과는 달리 이 지역 최고 상층부의 포식자가 하늘에서 나타났습니다. 사진에서 잘 보이라고 포샵을 좀 했습니다. 저 조그만 새가 바로 이 지역의 최고 날짐승인 콘돌 입니다.



콘돌이 나타나자 모두들 사진을 찍었는데, 그래도 그중 젤 잘 나온 사진이었습니다. 400mm 줌 렌즈로 잡은 것인데, 얼마나 높게 날던지 그냥 참새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400mm 보다 못한 카메라들로 찍은 것들이야 얼마나 작게 나왔을까요!!!!



최상위 포식자인 콘돌도 건드리지 못하는 동물이 바로 과나꼬였습니다. 이들은 덩치가 벌써 조랑말 정도 되기 때문에 콘돌이 낚아채기에는 너무 크거든요. 그래서인지 이들은 걱정이 없어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다가가도 그다지 겁도 내지 않더군요. 하긴 첨 보는 짐승들을 바라보는 인간들이 더 겁이 많았습니다. ㅎㅎㅎ



그리고 딸람빠쟈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 이름하여 쏘로, 즉 여우입니다. 이 녀석들이 얼마나 웃긴지, 주차장에 차가 서 있으면 밥좀 달라고 몰려듭니다. 큰 형님이나 큰 형이나 딸람빠쟈에서 일행을 따라가지 않고 그냥 차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는데, 이 녀석들과 한참을 놀았다고 하네요. 그래도 얼마나 영리한지 손에 먹이를 쥐고 있어도 1m 이내로는 접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 두 마리 보았는데, 정말 귀엽게 생겼더군요.



이제는 식물 편입니다. 모래 사막같은 곳인데도 여전히 나무들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뿌리가 아주 깊은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모진 환경속에서 살아남기 힘들텐데 말입니다.



이 나무는 백색 너도밤나무입니다.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둥치가 어마어마합니다. 감을 좀 잡아 보시라고 일부러 아기 하나를 같이 찍어 봅니다. 이런 환경에서 이정도 크려면 수백년은 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알 수 없는 열매도 있더군요. 먹을 수 있는 건지는 시험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구... 아무튼 아직 익지 않은 것 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식물들이 신기했던 것 한 가지는 잎이 송곳처럼 날카로운 나무들이 많았습니다. 고지대의 혹독한 환경은 나무들이 잎을 가지지 않도록 했나 봅니다. 나뭇잎이 없으니, 아니 작으니 어디서 광합성을 할까요? 그 결과인지 많은 나무들은 줄기가 녹색이었습니다. 바로 위의 사진에서처럼 녹색 줄기를 가진 식물들은 줄기 자체가 광합성을 한다고 하네요. 정말 자연은 신비롭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하루가 저물어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향하는데, 한 두시간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중간에 어디든 들러 잠을 잘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들른 곳이 차미칼 Chamical 이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뿐인 호텔에서 잠을 잤는데, 시설이 영... 권해드릴 곳이 아니더군요. 다음에 이쪽으로 코스를 잡을 때는, 차미칼에서 자지 않도록 코스를 변경해야 할 듯 합니다. 여러분도 꼭 그렇게 하시길 바라구요. ㅎㅎㅎ;; 이제 돌아가는 길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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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도 먹었고, 이제 딸람빠쟈 국립공원 투어를 할 차례입니다. 앞서 보여드렸던 트럭 안쪽으로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저는 제일 앞쪽으로 앉았습니다. 가면서 사진을 찍을 요령으로 말이죠. 한동안 아스팔트로 가더니 저렇게 급수트럭이 거꾸로 서 있는 곳에서 아스팔트가 끝나고 거기서부터는 모래밭길이 시작됩니다. 이곳에 4륜 구동 트럭과 버스들만 다니는 이유가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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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길로 들어서자 사진에서 보아왔던 딸람빠쟈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계곡 사이로 보이는 저 벽이 그 유명한 딸람빠쟈의 모습이군요. 사진에서 보았던 딸람빠쟈가 눈 앞에 드러나니 기분이 묘합니다. 



딸람빠쟈의 기묘한 벽이 보일 때까지는 트럭의 안 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후 한 곳에서 내려서 벽을 쳐다본 후로는 트럭의 지붕위에 놓여진 자리로 앉게 됩니다. 이게 160 페소와 220 페소의 차이였던 모양입니다. 160 페소짜리는 그냥 차 안에 앉아 있어야 하지만, 220 페소짜리 투어는 지붕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좀 돈이 더 들더라도 기왕이면 220 페소짜리 투어를 해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옵션이 있습니다. 잠시 후에 보여 드리죠.



딸람빠쟈의 벽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조그만 타조처럼 보이는 새들이 두 마리가 지나갔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짐승들을 그런대로 사진도 찍고 그랬죠. 딸람빠쟈 벽 아래 모래위로 지나가는 새 두마리가 보이지요? 이제 딸람빠쟈의 모습을 그냥 올립니다. 사진으로 감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자 이렇게 목을 올려서 위로만 보았더니 좀 목이 아프군요. 그때쯤해서 경치가 제일 좋은 계곡에서 운전사와 안래를 하던 가이드는 임시 식탁을 차려놓고 다음 사진의 내용을 대접을 하더군요. 백 포도주와 오렌지 주스와 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라 리오하의 맛있는 올리브(아쎄이뚜나)와 몇 종류의 과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멤브리죠라는 과일로 만든 후식까지. 이게 220 페소짜리 투어의 또 다른 옵션이었습니다. 이제 더 적극적으로 220 페소짜리를 추천하게 합니다. ㅎㅎㅎ




딸람빠쟈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를 가늠해 볼 만한 사진입니다. 제 형의 키는 170cm를 좀 넘습니다. 큰 형이 저 끝에 가서 손을 위로 쳐들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위쪽으로 딸람빠쟈의 벽 하나가 서 있습니다. 이렇게 높은 벽들이 정말 미끈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 정말이지 너무너무 특이하게 만들어줍니다. 여러분도 딸람빠쟈에 꼭 오셔서 이 광경을 즐겨 보시기 바랍니다.






한 군데 이르렀을 때, 다시 차에서 내려 한 바위를 보았습니다. 저 바위의 이름은 동방 박사라고 합니다. 돌의 모습이 마치 낙타위에 올라탄 동방박사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아무튼 사람들의 상상력과 자연의 모습이 어우러져 특이한 모습과 이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투어의 마지막 부분에 갔을 때, 만나게 된 수도승 바위입니다. 멀리서 보았더니 정말 수도승처럼 보였는데, 가까이가면서 사진을 들이대었더니 수도승이 사라졌군요. 쩝....



이 바위는 주제가 토템입니다. 공원 관리측에서는 드디어 사람들이 다가가지 못하게 경계선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마도 돈벌이를 위해서, 좀 더 오랫동안 그렇게 하기 위해서 관광객들이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모양입니다. 아마도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 친구는 주제가 탑 입니다. 정말 탑처럼 생기기도 했지만, 이름도 참 잘 갖다 붙였습니다. 이 친구도 몇 년 후에 오면 좀 모습이 달라졌으려나요?



이렇게 딸람빠쟈 공원의 모습을 즐겨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냥 눈으로 보는 경치가 아니라 좀 더 세부적인 것들도 담아 보았습니다. 그 사진들은 다음 포스트에서 게재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저도 하나 포스팅을 벌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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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여섯째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느즈막히 일어나서 딸람빠쟈 국립공원 Parque Nacional de Talampaya 을 향해 달려갑니다. 위 사진의 표지판에서 볼 수 있듯이 38번 국도로 달려가야 합니다. 라 리오하에서부터 딸람빠쟈 까지는 150km 정도입니다. 노면상태는 사진에서는 별로 안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상당히 좋습니다. 구멍하나 없는 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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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빠뜨끼아 Patquia 라고 하는 마을에서부터는 정말이지 위 사진처럼 저 끝까지 쭈우우욱 뚫린 일직선의 도로가 펼쳐져 있습니다. 일직선의 도로가 끝날 무렵부터 산의 경치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앞의 산자락이 보이시지요? 이 부분부터 볼 거리가 점점 많아집니다. 저 산등성이 너머는 산 후안 주가 됩니다. 라 리오하 주와 산 후안 주의 경계에 두 개의 국립/주립 공원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라 리오하 주로는 딸람빠쟈 국립공원이, 산 후안 주로는 잇치구알라스토 Ischiguasto 주립공원이 있습니다. 잇치구알라스토 주립 공원은 그 정식 명칭보다 달의 계곡 :바제 데 라 루나 Valle de la Luna 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 바제 데 라 루나 사진은 게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달의 계곡을 보시고 싶다면 포털에서 이미지 검색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로를 바로 옆으로 두고 기기 묘묘한 높은 산들이 있습니다. 도로를 끼고 가면서 딸람빠쟈까지 가는 몇몇 경치를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좀 보시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딸람빠쟈 국립공원의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매표소까지 가려면 또 몇 킬로미터를 가야 합니다. 그냥 여기는 국립공원 경계 정도로 보입니다.



야트막한 언덕을 하나 지나갔더니 오른쪽으로 거대한 무덤처럼 보이는 봉우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기괴하던지, 사진을 찍어 봅니다.



언덕의 흙더미처럼 보이는 산등성이에 또 특이한 바위처럼 보이는 돌이하나 있어서 찍어 봅니다. 아무튼 이 지역에서는 보이는 모든 것이 신비하게 보입니다.



시간이 흘러 거의 정오무렵이 되어서 딸람빠쟈의 매표소로 왔습니다. 이곳은 인류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특이한 지형의 모습을 볼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딸람빠쟈 국립공원에는 가이드 없이 개인적으로는 입장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공원 입구에서 밴을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각 밴 마다 가이드가 동행을 합니다. 그 밴들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하루에 입장할 수 있는 관광객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딸람빠쟈 국립공원을 가시려면 아침 일찍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공원 입장료는 1인 25페소입니다. 그렇게 비싸지 않죠?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가이드 없이 개인적으로는 입장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가이드가 동행합니다. 즉 밴을 이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밴을 제공하는 업체는 민간업체입니다. 두 회사가 있는데 그 중 한 회사가 전체 관광을 주도하는 회사이고 나머지 회사는 자전거 트랙킹 등을 제공합니다. 자전거 트래킹도 일단 밴으로 이동을 하고 끝 부분에서 자전거 등을 이용합니다.


밴을 제공하는 업체는 두 종류의 밴을 운용합니다. 하나는 일인당 160페소이고 다른 하나는 220페소였습니다. 160 페소는 미화로는 30불 정도, 220페소는 미화로 40불 정도가 됩니다. 그나마 160페소짜리 표는 다 매진된 바람에 저희는 220페소짜리로 끊어서 구경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공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인당 245페소씩을 지불한 셈이 되는 겁니다. (245페소는 아르헨티나 공식 환율로는 미화 50불에 해당합니다.)



245 페소짜리 투어는 오후 2시 30분에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의 2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점심 식사를 이곳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딸람빠쟈에서 먹는 점심 식사는 어떨까요? 다음 포스팅에서 그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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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까따마르까로 내려가는 길은 구비구비 계곡을끼고 정말 멋진 풍경의 길이었습니다. 역시 큰 형님은 여름에 이 길을 와야 하는데... 라시며 푸념을 하셨는데, 겨울에 이 정도 경치라면 여름은 정말 멋질 거라는 생각에 동감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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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급 커브가 정말 무지무지 많더군요. 큰 형의 말로는 평생 돌릴 핸들을 여기서 다 돌린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로 커브가 많았습니다. 한쪽으로는 낭떨어지인데도 그리 위험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도로가 좋았고, 또 주변의 경치를 보느라 아슬아슬한 부분을 느낄 틈이 없었습니다.



경사도 경사고, 커브도 커브였습니다. 이어지는 도로의 풍경을 좀 보시기 바랍니다. 중간에 전망대에 잠깐 서서 계곡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주로 도로의 풍경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다가 도시가 나올 때가 되었는데, 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모두 서 있습니다. 왠 일인가 알아보니 시위대가 국도를 막았다고 하네요. 근데 이 시위대라는 사람들이 하필 다리 앞에서 길을 막았습니다. 여기서 돌아가야 하나요? 알아보다가 도시로 들어가서 비포장 도로로 돌아다니다 다리를 지나서 계속 전진을 합니다.



그렇게 들어간 한 도시의 광장에는 1980년대부터 2000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보았던 모든 중고차는 다 모여있는 듯 합니다. 레나울트 11, 12, 18, Torino와 푸조 504, 405, 404 게다가 포드 Falcon도 있네요. 정말 대단한 중고 자동차 골동품점입니다. ^^



그런데 이렇게 도로를 점거한 시위대는 한 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자그마치 세 군데서나 도로를 막았더군요. 게다가 하필 도로를 막은 곳은 하나같이 다리 앞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튼 까따마르까로 가기 위해서 비포장 도로는 물론 진흙탕까지 다리를 건너기 위해 이상한 곳들로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이런 길로 다녔습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그래도 막판에는 좋은 도로에서 경치 좋은 곳으로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한 산을 지나가면서 큰 형님은 이곳이 얼마전 아르헨티나 정부를 대항해 게릴라전을 펼치던 반군들의 소굴이었다고 설명해 줍니다. 확실히 박식한 분이시지요?



까따마르까가 가까워 질 무렵에 멀리 산자루를 보면서 산마루에 있는 국도 이야기를 해 줍니다.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있는 국도인데, 포장이 안 되어있는 정도가 아니라 잔디밭이 도로라고 하네요. 그리로 올라가는 길을 보니 정말 까마득합니다. 다음 사진을 보시면 그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저 길로 한번 가보고 싶다는 호승심 혹은 호기심이 일었지만,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니기에 그냥 지나치기로 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잔디밭 국도는 어떤지 한번 가 볼 계획을 세워 볼랍니다. ^^




그렇게 그렇게 까따마르까 시내로 들어갑니다. 사실 볼게 별로 없는 도시입니다. 도시도 자그마하고 그냥 그저 그렇습니다. 까따마르까에 좀 특산품은 뭐가 있을까요? 큰 형님은 이곳이 올리브의 집산지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또한 이곳에서 독사의 독을 해독하는 약품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둘 다 경치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니 특별히 보여 드릴게 없네요.



까따마르까를 지나쳐 라리오하로 갑니다. 가는 길에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여행이 종반으로 향해 가는군요. ㅎㅎㅎ



라 리오하는 얼마전에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지냈던 사울 메넴의 고향입니다. 물론 라 리오하 시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구요. 메넴은 라 리오하의 주지사를 지내다가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친한파로 알려진 메넴은 현재 부정부패혐의로 이런 저런 안 좋은 일로 연루가 되어 있습니다. 대통령을 낸 곳이라서 그럴까요? 20여년 전에 이곳을 왔을 때는 정말 촌 동네였었는데, 지금은 좀 활기를 띈게 그런대로 괜찮아 보입니다. 일단 저녁을 지내고 낼 아침에 한번 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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낄메스 Quilmes 이야기라고 하니까 아마도 아르헨티나 맥주 낄메스 Cerveza Quilmes 를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낄메스는 맥주가 아니라 인디오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낄메스 인디오들, 들어는 보셨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현재 부에노스 아이레스 남쪽에 있는 낄메스 지역의 인디오들인가?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지역에 인디오들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지금 이야기를 하는 낄메스 인디오들은 아르헨티나 북서쪽 살타 주와 뚜꾸만 주 경계 부근에 살았던 낄메스 인디오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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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어떻게 낄메스 인디오들의 폐허와 마주치게 되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여행이 종반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다섯째 날 아침이 밝자마자 까파자떼에서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남쪽으로 뚜꾸만으로 갔습니다. 아직 아침의 햇살이 비취고 있던 시간, 바깥 온도는 영하 2도를 가리키고 있었지요. 까파자떼로부터 뚜꾸만의 경계 부근까지는 모두 포도밭이었습니다.



황무지처럼 보이는 곳들을 개간해서 포도 농장을 세운 모습은 경제에 눈을 뜬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전의 황무지가 이제는 포도 농장으로, 그리고 미래에는 포도주 생산지로 탈바꿈을 하게 될 것입니다.



뚜꾸만 주에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곳에 낄메스 인디오들의 유적지에 대한 간판이 서 있었습니다. 돈을 받고 입장을 시키는 관광/유적지의 간판치고는 엉성하기만 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냥 인디오들의 것이겠거니 하면서 지나치기에는 또 뭐한것이... 아래 있는 ciudadsagradaquilmes@hotmail.com 이라는 이 메일 주소였습니다. 현대 사회를 철저하게 배척한 것도 아니면서 간판은 19세기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으니 말입니다.



유적지로 통하는 길은 비포장이었지만 좋았습니다. 아침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전 근대적인 유적지와는 아주 잘 매치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런 비포장 도로고 1킬로미터 정도를 갔을 때, 추위에 손을 비비며 한 인디오의 후손이 나타났습니다. 보아하니 이곳이 유적지의 입구인 모양입니다. 1인당 10 페소의 입장료를 받았습니다.



제 손에 쥔 것이 입장권입니다. 인쇄된 입장권은 또 최첨단 인쇄술을 사용했네요. ㅎㅎㅎ



입구 부근에 서 있는 기념비입니다. 2008년에 만들어진 모양이네요. 당연히 1990년대 초반에 이곳에 왔던 저는 낄메스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한게 당연해 보입니다.



낄메스 인디오들의 유적지입니다. 잘 보시면 산 중턱까지 집터가 있습니다. 젤 끝에는 추장이, 그리고 그 아래쪽으로 신분이 높은 인디오들이 살았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평민들이 살았던 모양입니다. 한때 이 지역에는 20000명에 달하는 인디오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과장된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닌 모양입니다. 실제로 인디오들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로는 적게 잡아서 2만 명이라고 하니까요. 나중에 전쟁에 지고 나서 포로로 끌려간 인디오들만 수천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그 숫자를 반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적지 입구쪽에 있는 선인장들의 모습입니다. 선인장들의 크기는 보통 성인의 서너배가 충분히 됩니다. 선인장의 하나 하나에 인디오들의 모자와 옷을 입혀 적군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이야기가 농담이 아닌 모양입니다.


낄메스 인디오들은 잉카에 의해서 한 번 정복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잉카는 이들 낄메스 인디오들에게 그들의 선진 문화 즉 축조술이나 관계 수로에 대한 기술과 지식을 전수하면서 개런티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발전된 지식과 기술을 전수받은 낄메스 인디오들은 이후 언젠가 이곳으로 침범해 들어올 스페인 사람들을 대항해서 싸우며 견딜수 있는 방법을 습지하게 된 듯 합니다.



유적지에는 수원이 없었습니다. 가까운 곳으로 산타 마리아 강이 있어서 유일한 수원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20000여 명이 이곳에서 거주를 하려면 강뿐 아니라 유적지 안쪽으로도 무엇인가 급수가 가능하게 하는 수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쉽게도 그런 흔적이나 그에 대한 정보는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유적지의 집터에서 하나 하나 볼 수 있었던 것은 벽 자체가 요새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벽의 두께는 어림잡아 7, 80센티미터가 되었습니다. 어떤 벽의 두께는 1미터가 넘었습니다. 이 정도 벽이라면 스페인 군의 총알이나 포탄으로도 겹겹이 두른 벽을 깨뜨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넓은 바위 위에는 인디오들이 절구로 썼을 것으로 보이는 구멍들이 많았습니다. 이 곳은 이른바 마을의 여러 여자들이 한꺼번에 일을 했던 장소로 보이네요. 절구처럼 보이는 구멍들이 한 두개가 아니라 십 수개가 한 바위위에 있었거든요.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더 시야가 넓어집니다. 이미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 큰 형과 큰 형님은 아래에서 올라오지 않고, 처음 온 사람들만 위로 올라갔습니다. 꼭대기에서 보면 정말 시야가 트여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겨우 중간 아래쪽에서 보았을 때에도 멀리 산타마리아 강까지 한 눈에 들어왔거든요. 아마 저쯤으로 행군해 오는 스페인의 군사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전략을 연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낄메스 인디오와 연합한 2 군데의 인디오 세력은 줄잡아 130년 동안 이곳에서 스페인 군대에게 저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배를 당하게 되었을 때, 살아남은 여자들은 뒤쪽의 산을 넘어 도망을 했고, 남자들은 수 천명이 1200킬로미터 떨어진 오늘날의 낄메스 지역까지 도보로 끌려갔습니다. 수 개월에 걸친 이 행군중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은 낄메스 인디오들은 자신들끼리 결의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여자들은 임신을 하지 않기로, 여자들이 임신을 하면 자결을 하기로, 남자들은 장가를 들지 않기로, 장가를 가더라도 씨를 남기지 않기로 결의를 했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그 결의를 지켰다고 합니다.


낄메스 인디오와 안데스 지역의 인디오들을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끌고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남 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도시의 도로를 건설하는 데 사용되는 석재 기술이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현재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를 덮고 있는 아스팔트를 살짝 걷어내보면 돌이 깔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같은 석재를 다루는 데, 안데스의 인디오들은 특별했던 모양입니다. 그 기술자들이 필요했기에 수천명의 인디오들을 포로로 끌고 간 것입니다.



오늘날 낄메스 유적지와 그 인근에는 2010년 기준으로 200여 명의 낄메스 인디오의 후손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 인디오들은 현대 사회의 문명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조상들의 유적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문자로 역사가 기록되지 않은 민족이다보니 복원에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낄메스 인디오들이 가지고 있었던 독특한 주거 방식같은 것들은 몇몇의 고증을 통해 어느정도 복원을 한 모양입니다. 저희가 방문한 이 유적지는 그런 복원 노력의 한 결과일 것입니다.



낄메스 인디오들의 유적지에는 이렇게 한산한 기념품 가게가 있습니다. 큰 형님은 이곳에 만들어진 돌로 된 호텔에서 숙박을 해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가능하면 이곳에서 자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 호텔은 몇 년전에 있었던 어떤 분쟁 때문에 폐쇄가 되어 있습니다. 이 호텔의 폐쇄로 인해 낄메스 인디오들의 유적지는 더더욱 찾는 사람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호텔이 다시 개장을 하게 된다면, 이곳에서 한번 꼭 숙박을 해 볼 것을 큰 형님으로부터 권고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기회가 된다면 이 호텔에서 꼭 숙박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출발하기 전에 본 간판입니다. 1534년부터 1665년까지 자그마치 131년동안 스페인 정복군에 맞서 저항했다는 간단한 기록의 간판입니다. 개화라는 명목으로 수백년간 자연과 함께 살아온 문명을 파괴했던 16, 17세기의 유럽 강국들이 21, 22세기에는 더더욱 도마에 오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존 공생하는 길을 택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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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an 의 라틴 아메리카 이야기
이 블로그는 이과수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에 더해서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가지 이야기를 담게 되었습니다. 남미는 더이상 신비의 땅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보가 부족합니다. 이 방에서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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